2008/11/05 14:34

SBS '바람의 화원'에 등장한 동양화는?

스윽-슥. 붓이 움직인다. 계곡에서 머리를 감는 여인네들이 그림에 담긴다. 스윽-슥. 또 붓이 지나간다. 바람이 화선지 위로 불려와 사람들의 옷깃을 스친다. 화선지 위에서 사람과 풍경은 기운생동하다. 그러나 이제껏 동양화는 국사책과 미술책 속에서 죽은 활자일 뿐이었다. 그런 동양화가 이제 영상을 만나 힘껏 생동하고 있다. 단원과 혜원도 생명을 얻었다.

주지하다시피, SBS 수목 드라마 〈바람의 화원〉(연출 장태유·진혁, 극본 이은영)은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들을 주인공으로 했으니, 그림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임은 당연하다. 그래서 두 천재 화가들이 만들어내는 사건만큼, 그들의 손에서 빚어지는 그림은 흥미진진하다. 덕분에 관심사 밖이던 동양화가 새삼스레 우리의 전통문화로 자랑스럽게 인식되고 있다.

사실, ‘그림’을 영상으로 옮기는 작업은 쉽지 않다. 그동안 화가를 등장인물로 택하되, 그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드라마가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장태유 PD 스스로도 “그림이 드라마화 되기는 어렵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장 PD는 그림에 얽힌 사건들을 생생한 활자로 풀어낸 동명 원작 소설에서 힘을 얻어 좀처럼 시도되지 않았던, 우리의 전통 회화를 드라마로 옮기는 작업을 해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그림에 대해 전문적이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절반을 지나온 즈음에서 보면, 결과는 상당히 성공적이다. 〈바람의 화원〉은 단순히 그림을 드라마로 옮기는 작업에서 나아가, 그림이 영상과 만났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예술적 경지를 실현하는 중이다. “드라마를 보면 그림에 대한 감식안이 넓어질 것”이란 제작진의 호언이 단순히 치기는 아닌 것이다.



 
 
▲ '여장'을 하고 있는 신윤복(문근영)과 김홍도(박신양) ⓒSBS
“화폭 속에 살게 할 자들을 찾으러 가는 겁니다.”(신윤복)

〈바람의 화원〉의 백미라면, 단연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림을 꼽을 수 있다. 드라마는 화선지 위에 평면적으로 존재하던 사람과 풍경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살게 했다. 덕분에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보는 재미는 물론,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을 지 흥미로운 상상과 함께 지켜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단오풍정’의 장면이 있다. 도화서 화원이 되기 위해 시험에 응한 신윤복(문근영)은 ‘그네’를 주제로 한 시제를 받고, 시험장을 뛰쳐나간다.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라”는 김홍도의 말을 떠올려서다. 그래서 윤복은 여장을 하고, 단옷날 여인들이 목욕을 하는 계곡을 찾아간다. 정향(문채원)과 함께 그네를 뛰는 윤복의 눈에 머리를 감거나,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걸어가는 여인들의 모습이 포착된다. 그녀들의 모습은 곧 그림으로 전환된다. 이렇게 완성된 그림이 신윤복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단오풍정’이다.

‘단오풍정’의 장면은 〈바람의 화원〉이 단원과 혜원의 그림을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드라마는 단원과 혜원의 입을 통해 “그림에 담는다”거나 “그림 속에 살게 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기와 운이 생동하는’ 동양화의 특징을 집약한 말이다. 그래서 〈바람의 화원〉은 어떤 미술 교과서보다 훌륭한 동양화 교과서이기도 하다.

 
 
▲ 신윤복의 대표작 '단오풍정'
제작진은 또 그림의 평면적인 지루함을 탈피하기 위해 다양한 각도로 촬영해 역동성을 부여하고, ‘황묘농접도’에서처럼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해 나비가 날아다니고, 고양이가 고개를 돌리는 재치 있는 효과를 주기도 한다. 화선지에 밑그림을 그리고, 호분(조개가루분)을 칠한 뒤, 안료를 섞어 색을 입히는 일련의 과정들도 섬세하게 묘사해 눈길을 끈다.

이런 효과와 연출력도 높이 살만 하지만, 드라마에서 그림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카메라 뒤에서 묵묵히 단원과 혜원의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드라마의 숨은 공신인 셈이다.

현재 이종목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교수를 주축으로 안국주, 백지혜, 구세진 씨가 미술팀을 이뤄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들이 지금까지 그린 그림만 해도 수백장은 족히 넘는다. 촬영을 위해 같은 그림도 단계별로 여러 장 그리기 때문이다. 풍속화나 모사는 몇 시간 만에 완성하기도 하지만, 임금의 초상인 ‘어진’의 경우 석 달이나 걸렸다. 또 드라마 촬영을 위해 그림을 원작보다 크게 그리는 편이다. 길이가 8폭에 달하는 ‘군선도’ 역시 실제보다 확대해 제작한 경우다.

“그는 나의 제자였고,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친구였고, 그리고 나의 연인이었다.”(김홍도)

〈바람의 화원〉은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 이야기이자, 사랑 이야기이다.

 
 
▲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으로 분한 문근영이 '미인도'를 그리고 있는 모습 ⓒSBS

신윤복이 남장여자였다는 설정 아래 두 사람이 그림을 통해 우정을 나누고 사랑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역사학계에선 김홍도와 신윤복이 실제로는 만난 적이 없다는 게 중론이지만, 원작 소설의 이정명 작가는 상상력을 보태 두 사람을 사제지간으로 만들었고, 마침내 그들이 사랑하게 했다.

원작엔 등장하지 않지만, 드라마 제작진이 역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군선도’ 장면은 단원과 혜원의 향후 발전될 관계를 암시한 바 있다. 장태유 PD가 “영화 〈사랑과 영혼〉을 떠올리며 연출했다”고 밝힌 대로 두 사람이 함께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화가로서 그들의 열정뿐 아니라 애잔한 느낌마저 풍겼다.

신윤복과 기녀 정향이 만들어낸 장면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연정과 예술혼이 교차되는 지점을 포착해냈다. 정순왕후를 몰래 훔쳐보며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윤복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 결국 장파형(손을 못 쓰게 하는 형벌)을 당하기 전날 밤, 윤복은 정향을 찾아 닷냥을 내놓으며 가야금 연주를 청한다.

그리하여, 정향과 윤복의 가야금과 그림 ‘배틀’이 시작된다. 정향은 가야금을 연주하고, 윤복은 그 자락에 맞춰 붓을 움직인다. 가야금 자락과 붓의 움직임이 교차되는 장면은 연출 솜씨가 가장 빛난 장면 중 하나다. 그렇게 예술혼을 불태운 뒤, 윤복이 모든 게 끝났다며 한 줄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원작자와 제작진은 입을 모아 명장면으로 꼽았다.



단원과 혜원의 그림


기다림(신윤복)

드라마에서 윤복이 정순왕후를 그린 그림으로 설정됐다. 윤복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여인의 모습을 크로키를 하듯이 빠르게 그리지만, 오른쪽 귀 뒤에 난 점을 놓치지 않는다. 지나칠 정도로 정확한 눈은 결국 윤복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는 빌미가 된다. 원작에선 귀 뒤에 점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인도(신윤복)
드라마 첫회에 등장한 그림이며, 후에도 등장한다. 김홍도가 그림을 쓰다듬으며 흐느끼는 오프닝은 훗날 홍도와 윤복의 사랑이 슬픈 결말로 끝날 것임을 암시한다. 이 그림은 신윤복의 대표작으로, 조선 후기 여인의 아름다움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군선도(김홍도)
드라마에서 홍도와 윤복이 함께 그리는 그림으로 설정됐다. 군선도(위쪽 그림)란 신선을 여러 명 무리지어 있는 군상으로 표현한 그림을 말한다. 김홍도는 저잣거리에서 본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신선들의 얼굴을 그렸다. 총 8폭의 그림 가운데 한 폭이 여백으로 처리됐는데, 드라마에선 윤복의 실수로 먹물이 엎어진 것으로 설정했다.

송하취생도(김홍도)
극 초반, 김홍도와 신윤복이 장터에서 그림을 두고 싸우는데, 이때 등장하는 그림이 송하취생도다. 두 사람의 쟁탈전에 그림은 결국 찢어진다. 노발대발하는 주인의 성화에 윤복은 그림을 똑같이 그려내기로 하는데, 자신의 그림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윤복의 재능에 홍도는 적잖이 놀란다.



김고은 기자 nowa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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