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10 14:11

없어지고 나야, 의미를 다시 찾는 우리

[공연리뷰] 2008 ‘통영국제음악제’ 가을 시즌

월드스타로 칭송받는 비가 요즘 TV 예능 프로그램을 뜨겁게 달구고 있지만, 그 이전에 동양적 선율로 서양 현대음악을 뒤흔들었던 이가 있었다. 바로 작곡가 윤이상이다. 그는 1967년 ‘동백림간첩단사건’에 연루돼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됐다 지휘자 카라얀, 작곡가 슈톡하우젠을 포함한 수많은 예술인들의 서명운동 끝에 풀려나 1969년 독일로 망명했다.

 
 
▲ 작곡가 윤이상 ⓒ윤이상 평화재단
윤이상의 고향 통영은 전통문화의 자취가 살아 있으면서도 서구 문명의 유입으로 개화가 일찍 시작된 도시였다. 통영이 일제의 수산업 전진기지가 되자 대규모의 일본인들이 유입됐고, 그 때문에 가부키와 무성영화, 악극 등 다채로운 공연이 무대에 올려졌다. 통영 사람들은 경성(京城) 못지않은 선진문화의 세례를 받게 됐다. 1914년 원각사에 이어 두 번째로 근대식 극장 봉래좌(蓬萊座)는 그러한 상징성을 보여준다.

윤이상의 음악은 판소리, 남도소리, 통영오광대, 무속의 별신굿과 같은 토속정서의 체험, 그리고 통영의 교회와 학교에서 찬송가와 서양음악교육을 접한 데서 기인했다. 그의 재능은 그가 13살이 되던 무렵에 습작으로 쓴 소품이 봉래좌에서 영화음악으로 채택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얻은 음악적 경험과 유럽의 20세기 음악에서 얻은 그것을 고유한 개인양식으로 제한하며 결합하였다”고 학계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작품과 한국 현대사가 남겨놓은 남북의 이념 경계에 놓여있던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내 음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주에는 음악이 흐릅니다. 이 흐르는 우주의 음악을 내 예민한 귀를 통해 내놓을 뿐입니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은 작품이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술이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상에서 비롯됩니다.”

그를 기리는 ‘2008 통영국제음악제(Tongyeong International Music Festival)’ 가을시즌이 지난 1일 경남 통영에서 개막했다. 이번 가을시즌은 경남 국제음악콩쿠르 피아노 부문이 중심이 돼 8월 예심을 통과한 각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25명이 2일부터 9일까지 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본선을 치렀다.

 
 
▲ 금호아시아나솔루이츠 ⓒTIMF
본선 1차 예선에서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윤이상의 ‘피아노를 위한 다섯개의 소품’(1958)을 비롯한 현대 피아노 작품들을 연주했다. 결선 무대에서는 TIMF 앙상블(지휘 이대욱)의 협연으로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에프 등의 피아노 협주곡이 연주됐다.

가을시즌 공연으로 이탈리아의 연주단체 ‘파비오 비온디가 & 에우로파 갈란테’가 비발디의 ‘사계’(1일)를 연주했고, 첼리스트 장한나(26)와 런던 체임버 오케스트라(4일), 금호 아시아나솔로이스츠(7일) 등이 공연을 가졌다.

그 가운데서도 7일 저녁 ‘금호아시아나 솔로이스츠’의 공연은 대중적이면서도 젊음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이들은 만 30세 미만의 실력 있는 젊은 음악가들로 이뤄진 실내악단으로 로시니와 브람스, 슈베르트의 작품 가운데서 대중적인 곡을 연주했다.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각 곡마다 명랑하고 깔끔하게 연주됐고, 더블베이스가 풍부해진 음을 메웠다. 공연이 끝난 후 4번의 커튼콜이 계속됐지만, 준비한 앙코르 곡이 없었는지 연신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커튼 뒤로 돌아간 점은 아쉬운 점으로 꼽혔다.

이처럼 통영국제음악제는 윤이상의 작품이 끊임없이 현재에 재해석돼 연주되고 있고 클래식뿐만이 아닌 재즈, 뮤지컬, 국악 등 다양한 장르와의 만남을 통해 통영국제음악제만의 특색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결실은 2003년 출발한 경남국제음악콩쿠르가 내년부터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로 명칭이 바뀌게끔 만들었다. 2003년 첫 해부터 ‘윤이상 콩쿠르’로 시작하려 했지만 윤이상 관련 논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다 2006년 국내 최초로 UNESCO 산하 국제콩쿠르연맹에 가입, 2009년부터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로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이다.

 
 
▲ 1914년 봉래좌의 모습
1995년 타계한 윤이상 선생. 그는 이렇게 죽고 나서야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죽어서 살아나는 게 또 한 가지 더 있다. 앞서 언급했던 통영의 근대식 극장이었던 봉래좌(蓬萊座)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극장은 94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앙상한 철골 구조물들만 흉물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울보다 늘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개봉이 늦어서 불만이었지만, 〈영구와 아기공룡 쭈쭈〉에서 〈엽기적인 그녀〉, 〈친구〉까지 나와 함께 유년기를 보낸 극장이기도 했다.

이제 극장이 없어진 자리에는 주차장이 들어선다고 한다. 국가가 유산으로 보존할 수는 없었는지, 오래된 것들은 이렇게 사라져가야만 되는지. 없어지고 나야 사진과 자료로 그 의미를 찾는 일들은 늘 반복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것이 사람이든 유산이든 말이다.

원성윤 기자 socool@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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