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박지성을 만났다
[제작기]〈MBC스페셜〉 ‘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 김현기 PD
Celebrity Biography(유명인사 다큐)를 제작하기로 결심했을 때 세운 두 가지 결심이 있었다.
첫째, 어디서도 섭외에 성공한 적 없는 사람일 것.
둘째,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면모를 가진 사람일 것.
자신의 필요에 따라 흔하게 TV를 드나드는 연예인들이 아니어야만 했고, 이들에게 선택당하는 프로그램들과는 달라야만 했다. 그런 사람을 찾아내어 전인으로서의 내면을 끄집어내는 일. 그게 Celebrity Biography의 존재 의의라 생각했다.
쉽지 않았다. ‘TV에 전혀 노출되지 않은 유명인’이라는 역설적 설정의 한계를 절감할 뿐이었다. Celebrity를 찾아내는 작업은, 대한민국에 Celebrity란 칭호의 가치가 어울리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를 깨닫는 과정이었다.
▲ 〈MBC스페셜〉 ‘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에 출연한 축구선수 박지성 ⓒMBC
그러던 차에 우연히 박지성 선수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 봐라… 하루에도 영국에 있는 그에 대한 수십 개의 기사가 뜨고 그가 뛰는 전 경기가 TV를 통해 중계되지만, 난 유니폼을 입지 않은 그의 모습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대나무숲을 울리는 임금님 귀에 대한 소문처럼 웅웅대고 있지만, 그게 전부였다. TV속 박지성은 늘 축구에 대해서만 짧게 이야기할 뿐, 그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흥미로웠다. 세상에 담을 쌓고 사는 축구 스타라니… 하루가 멀다 하고 축구 선수들의 사생활이 수많은 가십거리를 만들어내는 꿈의 무대에서 뛰는 은둔형 이방인이라니… 그의 진정성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진정성을 먼저 꺼내 보이고 싶었다. 기획안 하나를 달랑 들고 곧바로 에이전트를 찾아갔다. 선수 생활을 통틀어 한 번은 해야 할 다큐라면, 지금 우리와 하자고 대뜸 말했다. 의외의 흔쾌한 반응에 이 섭외가 너무 쉽게 성사되는 건 아닌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인간 박지성에 대한 관찰자적 호기심과 스포츠팬으로서의 응원심을 버무린 이 파편적 감수성이 실제 제작 과정으로 전환될 때 얼마나 지난한 행보를 맞닥뜨릴지, 그 땐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우선 물리적 시간의 소요가 상상 이상이었다. 영국에 있는 박 선수에게 우리의 기획 의도를 전달하고 한번 해보자는 답이 돌아오는 데 한 달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촬영 스케줄을 조정하는 데만 또 다른 한 달이 소비됐다. 박지성 선수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데 꼬박 두 달이 넘게 걸렸다. 그 와중에 파업까지 두 차례나 발목을 잡았다.
박지성 선수를 한 겹 더 감싸고 있는 장벽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까다로운 촬영 허가 절차였다. 더 이상의 홍보가 필요 없는 세계 최고의 축구 클럽에겐 아쉬운 것이 없었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대여섯 팀의 취재진이 매일 훈련장에 진을 치는 그들에겐, 이 끊임없는 관심으로부터 선수를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역지사지하면 가장 선수들이 편하게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주는 곳, 촬영팀 입장에서는 홍보팀이 오히려 촬영의 걸림돌처럼 느껴지는 곳 ― 그 곳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 박지성 선수가 영어 수업을 받고 있는 모습 ⓒMBC
하지만 박지성 선수가 다큐에 출연하기로 확정된 순간을 기뻐할 틈도 없이, 난 이런 것들을 모두 가벼이 만들어버릴 만큼의 근원적 불안 요소를 떠올리게 되었다. 입을 여는 것에 지나치게 수동적인 박지성이라는 사람의 성향이 그것이었다.
그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보여준 박지성 선수의 인터뷰는 ‘팀이 이기는 게 중요하다’와 ‘최선을 다해 뛰겠다’로 요약되는 무미건조하고 무표정한 답변 일색. 때론 상대방을 무안하게 할 정도의 차가움까지. 과연 이 만만찮은 자기 보호의 껍질을 깨고 그의 생생한 감정이 담긴 자기고백을 들어낼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마저 들었다. 박지성 선수를 섭외해낸 성취감과 ‘내가 왜 하필 이 어려운 상대를…’이라는 때 아닌 후회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교차했다. 프로그램 완성도의 5할 이상이 다만 몇 시간에 달려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첫 정식 대면.
박지성 선수는 나의 불안감(아니, 불신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듯)을 비웃기라도 하듯, 카메라 앞에서 거침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의 톤은 높았고, 표정은 본 적 없이 밝았다. 그의 솔직함엔 조리가 있었고, 유머엔 자신감이 배어있었다. 자기 자신에게 최면이라도 건 듯,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의 질문과 그의 대답은 도전과 응전이 되어 합을 이어갔다. 그의 이야기에 흠뻑 빠진 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날 무렵, 난 이제야 진정으로 박지성을 만났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공적인 시공간에 처음 그 풋풋한 모습을 드러낸 ‘29세 청년 박지성’을 마주한 순간, 이 프로그램을 잘 만들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 역시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난 감히 이 프로그램의 제목을 〈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로 지을 수 있었다.
P.S. 박지성 선수를 넋 놓고 인터뷰하는 동안, 맨유 홍보팀엔 비상이 걸렸다. 박 선수가 아무리 괜찮다고 얘기해도, 홍보팀 관계자는 인터뷰룸을 두드리고 “Ji(박지성의 애칭) feels tired!”를 반복했다. 맨유 인터뷰룸이 생긴 이래 이렇게 긴 인터뷰는 없었다는 그 직원의 황당한 표정이 다시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결국 2번째 인터뷰는 박지성 선수와 팀 몰래 따로 날짜를 정해 외부에서 진행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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