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복과 타임머신
[내가 본 총파업(1)] MBC 예능국 오윤환 PD
저는 웬만해선 내복을 입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좋아하는 옆자리 짝꿍 여자아이에게 바지 밑단과 양말 사이의 살색 내복을 들킨 이후로 내복을 입지 않은지 벌써 20년 넘게 지났습니다. 심지어 한 겨울에 야외촬영이 있을 때에도 입지 않았습니다. 왜냐? 요즘말로 간지가 안 나기 때문이지요. 내복을 입으면 바지라인도 살짝 더부룩하니 이상해지고, 셔츠 목 부분 위로 내복이 보이기라도 하면 공들여서 코디한 나의 완벽한 패션에 오점이 되고 맙니다. 이 시대의 패션 트렌드와 세련된 유머의 가치를 선도해야할 ‘럭셔리판타스틱’ 예능PD로서 내복은 멀리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끔찍합니다.
▲ 지난 29일 오전 10시 여의도 MBC 방송센터 1층에서 열린 전국언론노조 MBC 본부의 총파업 집회 ⓒPD저널
그런 제가! 지금 하늘색 내복을 입고 총파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왜냐? 우라지게 춥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간지고 트렌드고 뭐고 해도 추위에는 장사가 없었습니다. 언론노조 총파업 출정식이 있던 날, 집에서 내복을 껴입을 때만 해도 투덜거렸습니다. 불만이 많았습니다. 부끄러움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 … 이 정부와 한나라당은 왜 나에게 내복을 입게 하는가…’ 그러나 이게 웬 걸? 내복을 입으니 예상외로 따뜻했습니다. 그 순간 내복을 멀리하던 제자신이 얼마나 창피하던지…. 내복에게 미안했습니다. 허영과 헛된 간지로 가득찬 제 된장남 같은 모습에 화가 났습니다. 그 순간,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원망도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매우 긍정적이고 건전한 정신세계를 지닌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감동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복을 입는 순간 초등학교 5학년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까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한 짜릿한 기분!!! 어린 시절 영화 〈빽 투 더 퓨처〉를 보고 항상 마음 한켠에 꿈으로 품어왔던 타임머신. 그 꿈이 2008년 지금 이루어진 것입니다. 비록 로또 번호를 알아내거나 할 수는 없지만, 내복 하나로 1980년대 후반의 대한민국을 느낄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멋집니다.
언론노조 총파업이 이제 5일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언론자유의 위기와 소통이 불가능해질지도 모르는 사회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예능국 노조원들 역시 자유로운 창의력이 행여나 자본에 의해 억압받지는 않을까? 다양한 실험정신으로 새롭고 기발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분위기가 사라지지는 않을까? 정치풍자나 시사풍자 프로그램은 아예 꿈도 못 꾸는 것 아닐까 하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은 나쁜 일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와중에도 작지만 소중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로 저는 이번 총파업을 통해 내복을 입게 되었고, 타임머신타고 20년 전으로 되돌아가 볼 수도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신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게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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