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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5/14 광우병 전쟁 20년, 영국에서 배운다 (5)
영국 것이 세계 표준으로 간주되는 경우는 그리니치 표준시 말고도 많다. 영국에서 처음 시작돼 전 세계로 확산된 것들 가운데는 의회민주주의나 산업혁명처럼 ‘오래된 근대’의 유물만 있는 게 아니다. 바야흐로 한국을 바싹 달구고 있는 그 유령, 비록 헛것이되 결코 헛되이 다룰 수만은 없는 대중적 열병의 진원, 바로 광우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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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에서 두명의 광우병 환자가 사망했다는 내용으로 지난 4월 7일 영국 BBC에 보도됐다. (사진출처=BBC) | ||
영국에게는, 광우병도, 인간 광우병도, 그에 관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도, 모두 실재했던 과거이자 엄존해 있는 현재이다. 1986년에 ‘소 해면상 뇌증(BSE)’이 확인된 후 무려 18만 건이 접수됐고, 1994년부터 2007년 사이에 163명이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콥병(vCJD)’으로 사망했다. 농업장관 존 거머가 네 살배기 딸을 데리고 나와 쇠고기 햄버거를 먹이는 눈물겹게 엽기적인 장면을 선뵌 게 1990년. 그로부터 6년 후, 영국 정부는 변형 클로이펠트-야콥병과 소 해면상 뇌증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 즉 인간 광우병을 유발한 물질이 광우병 쇠고기로부터 나왔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보고서를 공표하기에 이른다.
“미친 소가 당신을 죽일 수 있다”는 헤드라인이 등장한 1996년 이후 지금까지, 광우병은 영국 언론의 단골 소재이자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테마다. 광우병 발생 건수는 1993년을 정점으로 확연히 감소했고, 인간 광우병 역시 2000년을 고비로 현저히 꺾였지만, 2003년 무렵의 수혈에 의한 전염 문제, 최근의 학교 급식을 통한 인간 광우병 발생 주장 등 광우병에 대한 사회적 감도는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위험에 대한 대중적 지각은 흔히 공포감, 생소함, 노출 빈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공포를 안겨주는 위기란 대개 치명적이고, 비자발적이며, 잠재적으로 파국적인 것으로서 특히 미래 세대에 큰 위협을 안겨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껏 관찰된 바 없고, 확정된 지식이 매우 부족하며,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위해의 실제성이 드러나는 경우에 생소함이 작동한다. 마지막으로 해당 위험의 노출 빈도가 높을수록 그에 대한 대중적 지각이 강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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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정부에서 인간 광우병을 유발한 물질이 광우병 쇠고기로부터 나왔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보고서를 공표하기 전인 1990년. 당시 영국의 농업장관이었던 존 거머는 쇠고기의 안전성을 증명하기 위해 네 살배기 딸과 함께 쇠고기 햄버거를 먹는 장면을 선보였다. (사진출처=BBC) | ||
광우병이라는 ‘위험’은 이 세 가지 요소들을 거의 완벽하게 충족시켜주는 소재다. 그만큼 뉴스 가치가 높고, 또 그만큼 담론적 폭발력이 강하다. 영국 언론과 대중이 1996년을 전후로 토해낸 엄청난 물량의 사회적 히스테리는 축산업, 과학, 환경, 음식, 공중 보건에 관련된 불확실성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일종의 살풀이 커뮤니케이션이었다고 할만하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음울한 시나리오, 혹은 이른바 광우병 괴담의 원형이라고까지 할 만한 종말론적 공포가 영국을 넘어 유럽 대륙을 들끓게 했으니 말이다.
영국 언론이 광우병 의제를 다루던 구체적인 방식은 시기와 조건에 따라 일정한 변형을 거듭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선도적 언론들의 경고성 보도가 있었는데 “질병에 걸린 쇠고기가 판매되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면서 “영국 쇠고기는 안전하다”는 정부의 입장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정도였다. 영국 쇠고기에 대한 첫 수입 금지가 시작된 1990년은 광우병 담론의 선정성이 확연해지는 시기였다. 예방 조치로 암소 600만 마리를 살처분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이종감염 가능성에 대한 불길한 시나리오가 퍼져나갔다. 결국 1996년을 기점으로 인간 광우병 ‘괴담’이 현실화됐는데, 유럽연합이 내린 금수조치 이후로는 애국주의적 언론에 의한 ‘쇠고기 무역전쟁’ 담론이 영국 정부에 단비를 내려주기도 했다.
방송과 신문이 각각 광우병 담론을 다루던 방식 또한 주목할 만하다. 방송은 위기의 기원과 전개 과정을 ‘불편부당성’ 원칙에 따라 냉철히 추적하는 모습을 보였다. 명백한 정책 실패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수행하면서도 서로 대립되는 전문적 견해와 정치적 입장을 균형 있게 반영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와 달리 ‘정파성’에 근거를 둔 신문들은 주로 ‘친유럽연합’과 ‘반유럽연합’ 성향에 따라 대립했다. 쇠고기 금수 조처를 수긍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촉구하는 쪽과, 유럽 각국이 광우병 위험을 과장해 자국 시장을 보호하려 한다는 애국주의적 선동에 초점을 맞춘 쪽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앞장서 광우병 묵시록을 전파하더니, 갑자기 쇠고기 전쟁 ‘음모론’을 들고 나온 황색지들도 있었다.
당면한 위험에 대한 대중들의 직관적 판단은 흔히 ‘분노’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부풀려진 위협이라든가 통제 불가능한 공포와 같은 비합리적인 감정이 그 안에 섞여드는 건 외려 정상에 가깝다. 여기서 정부가 적절한 위험관리를 해내거나 정치의 순기능을 활용해 대중적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면 위험담론은 곧잘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 불신으로 이어진다. 기존 신념에 일치하는 정보만 선별하고, 그에 반하는 증거나 견해는 신뢰할만하지 않다거나 대표성을 띠지 못한다며 부정하는 태도는 불신을 가중시킬 뿐이다.
더군다나 위험 커뮤니케이션이 심리적 공황을 야기한다는 관점에서 언론을 통제하려 든다거나, 전문가들의 지식을 대중들에게 ‘교육’시키면서 무작정 안심을 유도하려는 정책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이것이 바로 광우병 위기 국면에서 영국 정부가 행한 그대로이다.
한국이 영국과 동일한 경로를 걸으리라는 보장은 물론 없다. 영국은 광우병을 직접 겪은 당사자인 반면 한국은 “광우병 발생 건수가 미미한” 미국 쇠고기를 수입하는 입장이다. 광우병 초기에 비해 통제 노하우도 많이 늘었을 테니 남들이 겪은 호들갑을 우회하여 ‘쿨’하게 행동할 만도 하다. 게다가 오늘날의 한국에는 광우병이란 소재의 엄청난 뉴스 가치를 외면할 수 있는 놀라운 인내력을 보유한 언론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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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런던=정준희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 문화연구센터 박사과정, KBS <해외방송정보> 영국주재 연구원 | ||
자국 쇠고기에 대해 수입제한 조치를 취한 나라들에게 영국 보수우파 언론이 제기하던 음모론을 자국의 수입제한 논의에 대한 “반미 빨갱이” 음모론으로 대체하고, 수출국의 쇠고기 품질까지도 나서서 보증해주는 한국 보수언론. 진정한 실증론적 과학주의와 국제적 개방성을 통해 보수우파의 고질적인 애국주의마저 넘어선 한국 언론의 신기원이 쿨하다 못해 자못 오싹해질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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