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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3 22:11

[방송 따져보기]〈이산〉, 역사왜곡 이전의 문제

특히 영상물에서, 스케일이라는 단어는 종종 협소하게 인식된다. 많은 물량을 투입하여 눈이 휘둥그레지는 화면을 선사하는 것이 많은 경우 ‘큰 스케일’의 정의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대규모의 세트라든가 휘황찬란한 미술의 형식 아래 벌어지는 이야기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신변잡기적이라면 그것을 큰 스케일의 작품이라 칭할 수 있을까? 요컨대 스케일이라는 말은 단지 형식적인 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내적 스케일 혹은 내용상의 스케일이라는 것도 작품의 성질에 따라 재단될 필요가 있다.

월화 드라마의 최강자가 MBC의 〈이산〉이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이 드라마가 후반부에 이르러 노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빈약하기 짝이 없는 내적 스케일이다. 최근의 〈이산〉은 정조 즉위 이후 홍국영(한상진)의 몰락 과정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문제는 이 과정이 궁중 암투 혹은 우연적 전개에만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홍국영은 여동생을 후궁으로 입궐시키고, ‘원빈’이라는 칭호를 얻은 후궁 홍씨(지성원)는 거짓으로 임신 사실을 고한다. 사실이 들통 나려하자 홍국영은 내의원과 역당의 결탁을 주장하고 역당으로 몰려 억울하게 쫓기던 이는 송연(한지민)에 의해 목숨을 구한다.

역사서에 따르면 원빈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후궁으로 입궐하여 1년 후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니 사실 극중에서 표현된 바와 같은 이야기는 애초 성립할 수 없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가지고 역사왜곡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사극에서 허용될 수 있는 픽션으로서의 내용이 단지 암투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조가 즉위한 이후 시청자들이 〈이산〉에 기대했던 내용은 반대파들과 맞서 싸우면서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어낸 천재 군주’의 모습일 텐데, 6월 종영을 앞둔 이 드라마에서 그 같은 모습을 보기란 요원하거나 이미 극 자체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듯 보이니 말이다. 모든 사건들이 공적인 장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음모와 술수를 통해 벌어지고, 그 암투의 세계 또한 참으로 협소하다.

도화서라는 배경과 송연이라는 캐릭터 또한 극의 또 다른 축이다보니 그 암투들과 ‘우연적’으로 결부될 수밖에 없고 스케일은 점점 더 작아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하여 정조와 조정 신료들이 벌여야 할 정치적 갈등은 어느덧 들러리로 전락해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인물만 정조시대의 인물들이다 뿐이지 〈이산〉의 시간적 배경이 18세기 무렵이라는 사실 또한 종종 잊게 된다.

이 같은 암투 에피소드의 연속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이병훈 PD의 전작인 〈서동요〉, 〈대장금〉, 〈허준〉을 통해 익숙해진 플롯 전개 방식인 까닭이다. 하지만 극의 중심인물이 의원이거나 수라간 나인이라면 협소한 스케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산〉의 주인공은 숱한 정치적 이해관계들과 맨몸으로 부딪혀 스스로의 의지를 관철시켜 나가야 할 군왕, 정조다.

   
▲ 조민준 월간〈판타스틱>편집장/드라마 비평가

굳이 정통 정치사극의 길을 걷지는 않더라도, 드라마의 헤드 카피와 같은 정조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해서라면 〈이산〉은 최소한의 내적 스케일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조선조 최고의 성군 중 하나였던 성종의 진면목은 보여주지 못한 채 스캔들의 희생양으로 전락시켰던 〈왕과 나〉의 패착을 〈이산〉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옳을 일이다. 현재로서는 그 거리가 썩 멀어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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