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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4/07 [우석훈 칼럼] 만화 ‘태일이’를 보고
2009/07/06 16:37

프로 문학이 다시 돌아오는가


[우석훈의 세상읽기]

 
▲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88만원 세대 저자)
올해 두 편의 한국 만화책을 읽었다. 하나는 최호철이 전태일 열사의 일대기를 5편의 책으로 엮은 〈태일이〉였고, 또 다른 하나는 최규석의 〈100℃〉였다. 하나는 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또 다른 하나는 8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공통점은 두 가지 모두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져 있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최호철과 최규석의 스타일 차이만큼이나 두 개의 작품은 약간은 상이한 감성 터치를 하고 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판매량이라고 할 것이다.

배본소 중심의 만화 제작에서 최근의 웹튠과 단행본 중심으로 만화 제작방식이 전환되고 난 이후에 만화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의 상위에 들어온 적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규석의 〈100℃〉는 그야말로 뜨겁다. 물이 100℃가 되어야 끓는데, 99℃에서 멈추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책은 아마도 이번 여름 최고의 문제작이 될 것 같다. 사실 이 책이 발간된 것 자체가 이미 인터넷에서의 열기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단행본으로까지 발행할 생각이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인터넷에서 뜨겁게 진행된 열기가 실제 출간까지 이어졌고, 이게 다시 밑바닥에서 열기를 만들고 있다.

만화 〈태일이〉가 한국에서 프로 문학의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만화 〈100℃〉는 이제 프로문학이 출간을 목표로 하는 단계에서 한국 독자들의 감성을 가장 먼저 적셔주는 최전선으로 갔다는 것을 의미하고, 상업적으로도 의미 있는 순간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년에 일본에서 고바야시 다키시의 1929년 〈게공선〉이 재발간되면서 아마 이제는 50만부가 넘어갔을 정도로 뜨거웠었다.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미니북으로도 발간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수만 명의 일본 20대가 일본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지역 비정규직 노조에 가입하는 등 이 책의 반향은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급기야 이 우울하면서도 딱딱한 얘기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사회적 현상은 10년 격차를 두고 벌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오타쿠, 프리터, 은둔형 외톨이 현상이 일본에서 사회적으로 문제로 논의된 지 거의 10년 후에 한국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전개된 경향이 있다. 문학에서도 이 차이가 좀 생기는데, 일본에서 사소설 열풍이 분 이후에 한국도 오랫동안 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분자화 된 개인들에 대한 얘기들이 열풍이 있었다.

 
 
▲ <100℃> (최규석, 창작과 비평사, 2009)
그러나 20대 청년실업과 알바 현상에 대해서는 대단히 드물게 한국과 일본이 거의 공조 현상을 보이고 있고, 어쩌면 해방 이후로는 처음으로 한국과 일본이 동일하게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게공선〉과 불과 1년 격차를 두고 한국에 최규석의 〈100℃〉가 그야말로 뜨거운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것은 사실상 일본과 한국, 두 나라에서 거의 동시에 오랫동안 수면 아래에 있었던 프로 문학, 즉 ‘가난한 프로레타리아의 문학’이 잠을 깨고 떠오르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여기에는 일본의 자민당, 한국의 이명박 정부에 대한 대중들의 지독할 정도의 피로감과 함께 이제는 개선 혹은 보수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꼬여버린 양국 자본주의의 문제점 특히 노동의 재생산에서 벌어진 척박한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프로 문학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한국의 TV가 읽어내는 시대의 감수성 혹은 시대의 첨병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규석은 나에게 “이해하기 위해서 경험을 할 필요는 없다”라는 명제 하나를 가슴에 남겼다. 흔히 87년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87년의 당사자들은 “너희는 그 시대를 모른다”라는 ‘꼰대짓’을 하기 일쑤다. 그러나 오히려 최규석은 이해당사자가 아니기에 더 담백하게 그 시대를 아주 가는 스토리 라인으로 풍성하게 감정선을 건드리고, 이것이 한국의 10대와 20대에게 제대로 꽂혔다. 50대 데스크의 ‘왕꼰대’들의 감성으로는 지금의 10대와 20대의 서정과 상상력을 건드릴 수가 없다는 말일까? 자, 방송계에서는 ‘프로 문학’이라는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새로운 트렌드를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기대되는 바이다.

이제 한국 문학도 80년대로 가고, 9시 뉴스 스타일도 80년대로 간 것 같다. KBS 라디오는 벌써 몇 달 전에 80년대로 간 듯하다. 한 쪽은 87년 스타일로, 한 쪽은 전두환 스타일로, 다시 한 번 프로문학과 서정문학의 경쟁이 시작되는가? 꼰대와 젊은이의 싸움이 다시 한 번 스크린을 놓고 붙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규석의 〈100℃〉는 TV가 바보가 되면 사람들은 다시 책을 붙잡고, 문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탄 아닐까? 한국의 프로 문학은 이제 기지개를 켜고, 왜 저항으로 문학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걸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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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7 13:42

[우석훈 칼럼] 만화 ‘태일이’를 보고

원래도 나는 눈물이 많은데, 마흔 줄이 넘으면서 원래도 많던 눈물이 더 늘었다. 토요일에는 연극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를 보면서도 울었고, 지난주에는 일본 영화 〈스윙 걸스〉를 보면서 아예 울음보가 터졌었다. 명박 시대를 살면서 다른 건 모르겠는데, 감성은 풍부해져서 좋은 것 같다. 근래에 내가 본 영화 중에서 울지 않았던 것은 〈적벽대전 2〉와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 정도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다찌마와 리〉는 웃다가 눈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나 같은 B급 감성의 소유자에게도 유머의 단수가 너무 높아서 그런지, 마음껏 웃기에는 좀 무리였던 듯싶다.

어린이용 잡지 〈고래가 그랬어〉에 연재되었던 최호철의 5권짜리 전태일 얘기인 만화 〈태일이〉는 신빈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근의 비정규직 문제와 청년 인턴, 그리고 신규 취업자 월급 삭감 등의 얘기와 겹쳐지면서 간만에 실컷 울었다. 최호철의 전작 〈을지로 순환선〉을 읽을 때에는 눈물은 나지 않았고, 왠지 먼 곳을 여행한 듯한 느낌과 함께 앞으로 닥쳐올 서울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아주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그 속에서 잊혔던 존재인 노동자 특히 여공의 인권 문제를 맨 앞에 가지고 왔던, 그래서 한 때는 예수와 같은 예언자의 반열에 비교되기도 했던 전태일 얘기가 2009년이라는 이 공간에서 더욱 각별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빈곤이라는 문제가 다시 돌아오고 있고, 40대-50대 남자들과 아파트 거주민은 과잉 대표되어있는 반면, 그 외의 카테고리에 사는 사람들은 과소대표 되어있다.

전태일이 분신하던 그날의 사장들의 모습과 지금 알바 고용인들의 모습은 다를 게 하나도 없고, 근로기준법을 태우면서 자신의 몸도 같이 태우던 그날의 모습과 오늘의 비정규직보호법이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사람 사는 데에 어찌 모든 것이 다 편하고, 불만이 없겠는가만은, 그 때의 노동부와 시청, 그리고 그 때의 경찰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또 역시 판박이이다. 만약 노조도 존재하지 않던 당시 청계피복노조를 만들기 위한 전태일의 희생이 지금 또 필요할까? 만약 알바 중에 누군가가 그 때처럼 ‘바보회’를 만들어서 집단행동을 한다고 하면 역시 청계천과 똑같은 모습을 보게 될 것 같다.

    


▲ 만화 <태일이> (글 박태옥, 그림 최호철, 돌베개, 2007~2009)

최호철의 만화 〈태일이〉에는 ‘벽’이라는 상징으로 사회적 구조가 묘사되어 있다. 이 벽은 존재론적인 장애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식론적인 벽이기도 하다. 개인 혼자서는 이 벽을 어쩔 수 없기도 하고, 동시에 고립된 개인은 이 벽의 모습과 형태를, 심지어는 벽의 존재마저도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지금 한국의 많은 20대에게 그렇고, 여성들에게 그렇고, 지방거주민들에게 경제는 그 자체로 벽이기도 하고, 왜 자신들의 삶이 지금 빈곤으로 내몰리고 있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삶이 이렇게 빡빡한지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어쩔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 그것을 우리는 ‘경제’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한국형 신자유주의, 즉 토건적 왜곡과 시장근본주의가 이상하게 결합되어 있는 그것, 그게 바로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벽이 아닌가 한다.

이 시기에 그렇다면 과연 한국의 방송은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전태일의 등장과 분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언론은 방관자이며 동시에 방기자이기도 했다. 지금 한국의 구조는 그 때와 대단히 유사하게, 그날의 경찰과 그날의 공장장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 지휘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하루하루 살아가는 비정규직과 경제활동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조여 오는 순간이다.

그 때와 달리 지금은 민주화되지 않았는가? 경제적인 눈, 정확히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경제적 삶에서 도대체 무엇이 민주화되었는지, 사실 나는 도통 모르겠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고 삶을 생각한다면, 역시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배고프고, 주거권 확보가 어렵고, 보건권 확보가 어렵다. 다만 그 때의 청계피복노조를 만들고 싶어했던 그 시기의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바뀌거나, 청년 인턴으로 바뀌거나, 아니면 알바로 바뀐, 그 이름만이 다를 뿐 경제적 상황은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 서러운 사람들에게 방송이 힘이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 그 때에도 사장과 경찰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언론의 그 비겁함을 오늘날에 다시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제발 “너만 잘하면 희망이 있다”느니, 모든 것은 “너 하기 나름이다”라는, 당시의 한국 지배층이 전태일에게 하던 말을 지금의 방송이 다시 반복해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벽 바깥에서 지금 고통 받는 사람들을 ‘게으른 사람들’ 아니면 ‘고생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라고 바라보지 말고, 벽 바깥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 속으로 더 들어가면 좋겠다. 그래야 희망이 생길 것 아닌가? 희망의 집단 최면 대신, 희망을 향한 집단 진화, 그것이 지금 우리가 전태일을 다시 읽는 이유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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